[의원의 맛과 멋]①기적이라고요?…스스로 개척한 운명입니다

최도자 바른미래당 의원 국회뉴스ON 인터뷰
30여년 동안 국공립어린이집 원장 지낸 보육전문가 출신
20대 총선에서 운명적으로 '마지막 티켓' 끊고 국회에 입성
보육인 출신 첫 국회의원…현장에 발딛는 밀착형 정책 강점
누구는 "기적이다"고 했다. "로또 맞았다"는 평가도 있었다. 2016년 20대 총선 제3당(국민의당)의 비례대표 끝순위(13번) 당선자. 주변은 물론 본인조차도 기대가 크지 않았다. 열심히 당을 위해 헌신해 "한 명이라도 더 원내에 진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최도자(63·비례대표·초선) 바른미래당 의원은 국회뉴스ON과의 인터뷰에서 "13번이라도 잘받은 거 같은데 다들 늦게 받았다(늦은 번호를 받았다)고 했다"며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한번 열심히 도와줘보소. 국회의원은 마음에 드는 사람 찍고 당이라도 국민의당 찍어보소' 하고 열심히 다녔다"고 뒤돌아봤다.
최도자 의원은 20대 총선 이전까지 선출직 공직자에 출마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다. 주변에서 (여수)시의원·(전남)도의원 출마를 권유할 때에도 묵묵히 우리나라 보육현장의 최일선을 지켰다. 그렇게 국공립어린이집 원장을 한 것만 30년이 넘었다. 최 의원의 정책·입법 활동은 그래서 항상 현장을 기반으로 한다. 전국에 있는 보육교사들은 물론 어린이집에 다니는 영유아와 학부모의 목소리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헌정 이래 '보육인 출신 첫 국회의원'으로서 오랜 노하우를 갖고 중앙정치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최 의원의 이야기를 국회뉴스ON이 들어봤다.
◆"남자가 하는 일은 다 해보고 싶어 했죠"
최 의원에게 어떻게 정치권에 입문할 생각을 했는지 물었다. "저는 이상하리 만큼 남자가 하는 일에 다 매력을 느꼈어요. 참 묘하죠"라는 답이 돌아왔다. 최 의원은 여수국가산업단지(옛 여천공단) 인근 한 시골마을의 8남매(4남·4녀) 가정에서 자랐다. 가난한 가정형편 탓에 언니·오빠들은 기술을 배우러 객지로 나가고, 동생 둘과 함께 시골에 남아 담배농사를 도왔다. 이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지 못했다. 그는 "학교에 가고 싶은데 못가게 하니까 병이 올 거 같았다"고 했다. 부모님을 졸라 동년배보다 2년 늦게 중학교에 들어갔다. "중학교 졸업하면 농사란 농사는 다 할게요"란 약속을 한 뒤였다. "(처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을 때) 엄청 화가 나서 '아버지 뭐하러 나를 낳았소'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불효야. 엄마가 낳았지 아버지가 낳은 것도 아닌디. 하하하."
최 의원은 중학생 시절 고구마 농사를 지을 때의 일화를 들려줬다. "남자들은 왜 고구마를 지고(지다·등에 얹다) 다니고 여자들은 이고(이다·머리에 얹다) 다닐까…. (여자들도) 지고 다니면 능률이 오를 거 같은데 참 이상해. 나도 한번 지어 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아버지 한번 지어 봅시다' 하니까 '여자들은 이고 다니는 거야' 그러시더라고. 아버지처럼 많이는 아니고 좀 작게 해서 한번 지었는데 자꾸 뒤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두세 발 떼니까 뒤로 넘어져 버렸어요. 또 남자들이 자전거를 타니까 자전거를 배웠죠. 자전거를 배워놓으니까 앞에 바구니를 하나 사줘서 심부름을 많이 다녔지. 그러니 '좋다' 하시더만요. 남자가 하는 일은 다 해보고 싶어 했죠."
최 의원은 상고(여항여자상업고등학교·현 진성여고)를 졸업하고 우체국에서 출납 일을 했다. 그는 우체국에서 2년여 근무한 뒤 여군 하사관(부사관)에 지원해 합격했지만 결국 의도를 달성하진 못했다. 안정적인 체신공무원 직장이었지만 반복되는 업무를 하는 답답한 일상이 싫었다. "여군 하사관 시험을 봐서 합격을 했어요. 내가 우체국에서 근무를 해서 나한테 합격통지서를 바로 주면 될 것을 집에다가 갖다 준 거야. 집에서 난리가 났죠. '뭣 놈의 가시나가 군대를 가려고 하느냐'고. '아들도 군대 보내놓으면 잠이 안오는데 딸이 군대를 가려 하느냐'고. 엄마가 밥을 안드시고 울고 그러시더라고요. 결국 입대하지 않고 몇 년 후에 사표를 내고 학원을 차렸어요."
◆"아이들 가르쳐보니 적성에 딱 맞았습니다"
최 의원의 학창시절 꿈은 '선생님'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3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고교생 시절, 가정형편 탓에 학교 실과 선생님의 집에서 먹고 자고 통학을 하면서 세 자녀(중1·초5·초3)의 개인교사 역할을 했다. 당시 아이들의 학교 성적이 단기간에 크게 오르면서 인정을 받았고 보람을 느꼈다. "아이들을 가르쳐보면 적성에 딱 맞는 거예요. 보람을 엄청 느꼈죠.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니는 나중에 커서 뭐 되냐' 그러면 항상 '선생님 된다'고 했데. 그러면 우리 엄마가 너무 가슴이 아프셨데요. 선생님 시키려면 대학교까지 보내야 하는데, 학교를 못보낼 텐데 하면서 만날 안타까워하셨다고 해요."
최 의원은 체신공무원을 그만 두고 학원을 운영하면서 한국방송통신대에 입학해 유아교육과를 전공(최종 학력은 전남대 교육학 석사)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고 싶었다. 그는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고 어린이집에 들어가 31년간 보육분야에 몸을 바쳤다. 최 의원은 어릴적부터 리더십이 있었다. 고교생 시절 학생대표를 맡았고, 결혼한 이후에는 20대의 나이에 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아 전국 최연소로 기록되기도 했다. 국공립어린이집 원장을 하면서는 지역단위 연합회장부터 시작해 한국어린이집총연합회 부회장, 전국국공립어린이집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최 의원은 전남 어린이집 연합회장을 할 당시 주변에서 시의원·도의원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믿을 만한 지인이 찾아와 "비례대표에 신청해보라"고 권유했지만 결국 하지 않았다. "옛날에 선거가 있으면 합동유세를 해요. 많은 사람들이 가서 유세를 듣고 하는데 그걸 참 좋아했죠. 의원들이 의정활동을 하는 걸 보면 '저 사람 보다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이 있었죠. 하지만 남편이 '너는 너무 솔직해 정치에 안맞는다. 정치인들은 적당하게 말을 할 때도 있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하면서 별로 안좋아하는 거예요. 그게 상처가 됐었죠" 최 의원의 남편은 20대 총선 때부터는 전폭적으로 그를 지원하고 있다고.
◆그를 늘 응원해주는 두 어머니와 형제자매들
최 의원은 바쁜 의정활동 와중에도 지역에 내려갈 때면 두 어머니(시어머니·친어머니)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두 분은 모두 90대의 나이에도 정정하시다고. "주말에 내려가면 시어머니, 친정엄마 같이 모시고 목욕을 가서 두 분 모두 (때를) 밀어드려요. 차로 촌길 한 바퀴 돌고 갈비탕 한 그릇 먹고 모셔다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세요." 최 의원은 결혼을 하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40여년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제가 의원이 되고 나서) '아이고 장하다' 막 그러시지. 나를 며느리로 생각하지 않고 '작은아들이다. 아들같이 생각한다'고 하시거든요. 제가 시어머니한테 잘한다고 해서 여수에는 좀 소문이 나 있죠. 저보다 잘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친정부모한테 잘하고, 시어머니한테도 잘하고 그게 도리라고 생각을 해요."
최 의원은 가난한 시골마을의 8남매 가정에서 자랐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하지만 그의 형제자매들은 그 어느 집보다 화목한 분위기를 이어오고 있다. 첫째·둘째 오빠가 건강이 나빠져 돌아가신 이후로는 6남매가 끈끈하게 뭉쳐 우애를 과시하고 있다고 했다. "형제간에 우애가 없으면 남보다 못해요. 못사는 형제가 아파서 (병원비로) 얼마가 나온다는데 하면 괜찮게 사는 형제 서넛이서 '내가 얼마 낼게' 하면서 올케 모르게 중간계산 다 해버리고. 우리는 형제간에 밥도 잘먹어요. 지금이야 자식들도 착하게 크고 해서 크게 잘살지는 못해도 걱정없이는 살지요."
최도자 의원과의 인터뷰 ②편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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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의 맛과 멋]①기적이라고요?…스스로 개척한 운명입니다 국회뉴스ON 2018.05.14